JIMIN CHOI

© Shin Film / Under the Sky of Seoul (1961)
Beneath the Never Changing Skies of Seoul
끝없이 변신(變身)하는 우리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고 베를린 장벽의 건설이 시작된 해. 대한민국은 5.16 군사정변으로 나라가 뒤바뀐 해. 1961년. 나의 아빠가 한 살배기가 되던 위대한 해…
서울의 지붕 아래 김학규라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저질스러운 한약방 주인이 살았다. 흠투성이이지만 그런 그도 그럭저럭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잔소리가 조금 많은 부인. 미용실을 운영하는, 6.25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 딸(현옥). 그리고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백수인 아들(현구)도 있다.
제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옥은 김학규가 시기하는 양의(두열)와 연애를 하지를 않나. 하나뿐인 아들은 백수인 것도 모자라 술집주인 딸(점례)을 임신시키지를 않나.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투쟁이 될지도 모르는 지방선거에 나가보지만, 참패를 당하고는 온 집안을 말아먹기까지 한다. 제길, 씁쓸하다.
서울의 지붕 위에 아침 해가 섰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시대와 낡은 시대가 어깨를 겨누고 사는 이 골목 안에는 서울의 희한한 꿈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살아서 숨결 짓는다.
내용적으로 <서울의 지붕 밑>은 현재의 우리가 결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덕목이 된 21세기의 우리가 보기에는 다소 인위적인 말투(오디오)와 시대적인 에스테틱(aesthetic) 차이를 배제한다면, 그 근본에는 우리 모두가 경험해봤을 법한 가족 간의 갈등을 그린 패밀리 드라마(family drama)가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 속 갈등의 원인들이 현재까지도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쓰이는 것만 봐도 이 영화의 앞서 간 시대적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시트콤계의 마에스트로 김병옥의 하이킥 시리즈만 봐도 아버지(혹은 할아버지) 중심의 가족 형태, 적절한 코믹 요소, 투닥거리면서도 세대차이를 넘어 화합을 이루는 불화스러운 화목함까지. <서울의 지붕 밑>과 많은 것들이 닮아있다.
하지만 단순한 내용을 넘어, 시대적 배경인 60년대의 렌즈를 끼고 이 영화를 본다면, <서울의 지붕 밑>은 격동의 시대를 겪고 있던 당시 서울 젊은이들에게 선사하는 응원가처럼 보여진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옛날의 것’을 탈피하여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는 태도를 지지하고, 그 변화의 선두에서 바람을 맞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사랑을 잃은 현옥은 현대의학을 공부한 남자로부터 마음의 치유를 받는가 하면, 현구는 아버지 김학규의 ‘라떼’(나 때)와 달리, 신분의 통념을 뛰어넘는 사랑을 쟁취한다.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를 나타내는 ‘올드’ 인물들과 비교해본다면 젊은 ‘뉴’ 인물들은 더 지혜롭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리를 다친 두열은 자신을 대놓고 싫어하는 학규에게 치료라는 명목으로 손을 먼저 내민다.)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것은 젊은 세대임을 암시하듯, 기성세대는 꽤나 바보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법은 경찰서에서 만든다’고 생각하는 몽현. 새로 유행하는 외래어(‘하트’, ‘키스’)들을 이해하지 못해 골머리를 쓰는 김학규와 친구들. 두열을 경찰에 허위고발하지만, 실패로 돌아간 학규는 친구들에게 허풍을 떨기도 한다.
당시 관객들은 주인공 ‘김학규’를 보며 (비)웃었을 것이다. 주인공임에도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를 주는 캐릭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2년의 나는 김학규를 보며 묘한 측은지심이 들었다. 자신이 한평생 믿고 따랐던 신념과, 시간에 의해 점차 어긋난 자존심을 지키려고 바동거리는 그가 안타까웠다. (누구는 ‘올드’가 되고 싶어 올드해지나, 한평생 이렇게 살아온 것을…)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하늘 아래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새것’이 아닌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깜깜한 밤, 나도 몰래, 끊임없이 무엇인가로 변신하고 있다는 것을.
한 살이던 나의 아빠는 어느덧 은퇴한 63살이 되었다. 얼마 전 아빠는 농담처럼 자초했다. “내가 벌레 같아. 삼시세끼 밥만 축내고 기껏 동네 산책이나 하는.” 김학규도 ‘희한한 꿈’ 속에서 자신이 하릴없는 벌레가 되어간다고 느꼈던 것일까. 벌레가 되지 않으려는 김학규의 몸부림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새로운 문명이란, 나라를 삼키고 사회를 삼키고, 인간까지 삼켜버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언제나 희한한 꿈은 존재한다. 벌레로 변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푸릇푸릇한 이파리를 오려, 각양각색의 벌레와 붙여서 기이하지만 아름다운 콜라주(collage)를 만드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
<서울의 지붕 밑>은 이런 ‘희한한 꿈’의 몸부림을 섬세하게 잡아낸 60년대 한국 영화의 수작이다.